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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사다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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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다이라 사다유키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까지 활동한 무장으로, 가케가와 번주, 구와나 번주, 이요마쓰야마 번주를 역임했다. 1587년 마쓰다이라 사다카쓰의 차남으로 태어나 1601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알현하고 1607년 아버지로부터 가케가와 번 3만 석을 물려받았다. 오사카 전투에서 후시미성을 경비했으며, 이후 구와나 번으로 옮겨 11만 석을 계승했다. 1635년 이요마쓰야마 번으로 전봉되어 시코쿠 지방의 도자마 다이묘 견제를 담당했고, 나가사키 단다이로 쇄국 정책 완성을 도왔다. 1651년에는 어린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를 보좌하는 유지노마즈메에 임명되었으며, 1658년 은거하여 1668년 82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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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사다유키
기본 정보
씨명마쓰다이라 사다유키
시대에도 시대 전기
출생덴쇼 15년 (1587년)
사망간분 8년 10월 19일 (1668년11월 23일)
개명사다유키, 마쓰야마, 가쓰야마
시호眞常院殿前侍従道賢勝山大居士
묘소에히메현마쓰야마시 슈쿠야의 조신지
관위종4위하, 가와치노카미, 오키노카미, 시종
막부에도 막부
주군도쿠가와 히데타다이에미쓰이에쓰나
도토미가케가와번 번주 → 이세구와나번 번주 → 이요마쓰야마번 번주
씨족히사마쓰 마쓰다이라 가문
부모아버지: 마쓰다이라 사다카쓰, 어머니: 다쓰
형제마쓰오기미, 사다요시, 사다유키, 사다쓰나, 아히메, 사다자네, 기위기미, 사다후사, 기쿠기미, 사다마사, 쓰루기미, 다마기미
배우자정실: 초주인
계실: 조렌인
자녀사다요리, 겟센겐쥰, 여자, 류코인, 구기미, 기쿠히메
양녀: 마쓰다이라 다다토모 정실
가케가와 번 번주 (히사마쓰 마쓰다이라 가문, 사다카쓰 계통 종가)
전임자마쓰다이라 사다카쓰
후임자안도 나오쓰구
임기1607년 ~ 1617년
대수2
구와나 번 번주 (히사마쓰 마쓰다이라 가문, 사다카쓰 계통 종가)
전임자마쓰다이라 사다카쓰
후임자마쓰다이라 사다쓰나
임기1624년 ~ 1635년
이요 마쓰야마 번 번주 (히사마쓰 마쓰다이라 가문)
전임자가모 다다토모
후임자마쓰다이라 사다요리
대수1
임기1635년 ~ 1658년

2. 생애

덴쇼 15년(1587년)에 마쓰다이라 사다카쓰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오쿠다이라 노부마사의 양녀이자 오쿠다이라 사다토모의 차녀인 다쓰(たつ)이다.[1] 게이초 6년(1601년)에 숙부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처음 알현하였다. 慶長 7년(1602년)에 종오위하(従五位下) 가와치노카미(河内守)에 임명되었다. 차남이었지만 본가와는 별도로 오미국 가모군의 2천 석을 받았다. 이듬해, 형 사다요시의 자결로 인해 적자(嫡子)가 되었다. 慶長 10년(1605년) 9월, 이에야스의 명으로 시마즈 다다쓰네(가히사)의 양녀를 정실로 맞이하였다. 慶長 12년(1607년)에 아버지 사다카쓰로부터 가케가와번 3만 석을 물려받아 적자의 지위를 유지한 채 다이묘가 되었다. 오사카의 진에서는 사다카쓰와 함께 후시미성을 경비하였다.

겐나 3년(1617년)에 사다카쓰의 세자가 되어, 가케가와를 막부에 반납하고 구와나번으로 옮겼다. 간에이 원년(1624년)에 사다카쓰가 사망하여 구와나 번 11만 석을 계승하였다. 3년 후, 오키노카미로 전임되었고 종사위하(従四位下)로 승진하였다. 간에이 11년(1634년)에 종질인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상경할 때, 도중 구와나에서부터 시종(侍従)에 서임되었다. 이에미쓰가 상경할 때 기마 공봉을 맡았다.

간에이 12년(1635년)에 이에미쓰의 명으로 이요국 이요마쓰야마번에 4만 석이 증가되어 전봉되었다. 시코쿠 지방으로의 최초의 가문 입부였는데, 이는 서국의 외양에 대한 견제와 경계를 위한 조치였다고 여겨진다. 간에이 16년(1639년)에 마쓰야마성의 천수를 5층에서 3층으로 개축하였다. 쇼호 원년(1644년)에 나가사키 단다이[1]에 취임하여 이국선과의 교섭에 임하고, 쇄국 제도의 완성에 기여하였다. 이에미쓰 사후 게이안 4년(1651년)에는 어린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를 보좌하기 위해 유지노마즈메에 임명되었다. 동석에는 호시나 마사유키(이에야스의 숙부), 마쓰다이라 요리시게(이에미쓰의 종질), 이이 나오즈미(후다이 필두 석고)가 있었다. 한편 같은 해, 막정을 비판하고 스스로 삭발 출가한 동생 마쓰다이라 사다마사(미카와국 가리야번 2만 석)가 개역되어 사다마사 일가는 사다유키에게 맡겨져 질거 처분을 받았다. 사다유키에게는 연좌는 없었다. 이후 사다마사는 사다유키의 영지인 이요국 마쓰야마에서 살았다.

만지 원년(1658년)에 72세로 은거하여 가독을 적장자 사다요리에게 양위하고 마쓰야마 동야 고덴(松山東野御殿)으로 물러났으며, 쇼잔(松山)이라 칭하였다(나중에 가쓰야마로 개칭). 이로 인해 가쓰야마 공(勝山公)이라 칭송받았다. 동야 고덴에서는 하이카이와 다도에 친숙해지는 등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다가 간분 8년(1668년)에 동야 고덴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82세.

정실은 장남 사다요리의 생모이다. 겐나 4년(1618년) 사망하였다. 장수원전 월창정천대녀(長寿院殿月窓貞泉大姉)로 추서되었다. 처음에는 구와나 장수원에 매장되었으나, 사다유키가 이봉되자 마쓰야마 성하에 장수원(나중의 호류지)이 건립되어 위패가 봉안되었다. 계실은 전실 장수원전의 양매이다. 메이레키 4년(1658년) 에도에서 사망하였다. 에도 아자부 조계사에서 화장되었고, 련향원전 호월정감대녀(蓮香院殿湖月貞鑑大姉)라는 시호를 받았다. 유골은 마쓰야마 장수원(호류지)으로 보내져 다시 정련원전 호월정감대녀(浄蓮院殿湖月貞鑑大姉)라는 시호를 받고 매장되었다.

2. 1. 출생과 초기 생애

1587년 마쓰다이라 사다카쓰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오쿠다이라 노부마사의 양녀이자 오쿠다이라 사다토모의 차녀인 다쓰(たつ)이다.[1] 1601년 숙부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처음 알현하였다.[1] 1602년 종오위하(従五位下) 하내수(河内守)에 임명되었다.[1] 차남이었지만 본가와는 별도로 오미국 가모군의 2천 석을 받았다.[1] 이듬해, 형 정길의 자결로 인해 적자(嫡子)가 되었다.[1] 1605년 9월, 이에야스의 명으로 시마즈 다다쓰네(가히사)의 양녀를 정실로 맞이하였다.[1]

2. 2. 가독 상속과 번주 시절

1587년 마쓰다이라 사다카쓰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오쿠다이라 노부마사의 양녀이자 오쿠다이라 사다토모의 차녀인 다쓰(たつ)이다. 1601년 숙부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처음 알현하였다. 1602년 종오위하(従五位下) 가와치노카미(河内守)에 임명되었다. 차남이었지만 본가와는 별도로 오미국 가모군의 2천 석을 받았다. 이듬해, 형 사다요시의 자결로 인해 적자(嫡子)가 되었다. 1605년 9월, 이에야스의 명으로 시마즈 다다쓰네(가히사)의 양녀를 정실로 맞이하였다. 1607년 아버지 사다카쓰로부터 가케가와번 3만 석을 물려받아 적자의 지위를 유지한 채 다이묘가 되었다. 오사카의 진에서는 사다카쓰와 함께 후시미성을 경비하였다.

1617년 사다카쓰의 세자가 되어, 가케가와를 막부에 반납하고 구와나번으로 옮겼다. 1624년 사다카쓰가 사망하여 구와나번 11만 석을 계승하였다. 3년 후, 오키노카미로 전임되었고 종사위하(従四位下)로 승진하였다. 1634년 종질인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상경할 때, 도중 구와나에서부터 시종(侍従)에 서임되었다. 이에미쓰가 상경할 때 기마 공봉을 맡았다.

1635년 이에미쓰의 명으로 이요국 이요마쓰야마번에 4만 석이 증가되어 전봉되었다. 시코쿠 지방으로의 최초의 가문 입부였는데, 이는 서국의 외양에 대한 견제와 경계를 위한 조치였다고 여겨진다. 1639년 마쓰야마성의 천수를 5층에서 3층으로 개축하였다. 1644년 나가사키 단다이[1]에 취임하여 이국선과의 교섭에 임하고, 쇄국 제도의 완성에 기여하였다. 이에미쓰 사후 1651년에는 어린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를 보좌하기 위해 유지노마즈메에 임명되었다. 동석에는 호시나 마사유키(이에야스의 숙부), 마쓰다이라 요리시게(이에미쓰의 종질), 이이 나오즈미(후다이 필두 석고)가 있었다. 한편 같은 해, 막정을 비판하고 스스로 삭발 출가한 동생 마쓰다이라 사다마사(미카와국 가리야번 2만 석)가 개역되어 사다마사 일가는 사다유키에게 맡겨져 질거 처분을 받았다. 사다유키에게는 연좌는 없었다. 이후 사다마사는 사다유키의 영지인 이요국 마쓰야마에서 살았다.

1658년 72세로 은거하여 가독을 적장자 사다요리에게 양위하고 마쓰야마 동야 고덴(松山東野御殿)으로 물러났으며, 쇼잔(松山)이라 칭하였다(나중에 가쓰야마로 개칭). 이로 인해 가쓰야마 공(勝山公)이라 칭송받았다. 동야 고덴에서는 하이카이와 다도에 친숙해지는 등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다가 1668년에 동야 고덴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82세.

정실은 장남 사다요리의 생모이다. 1618년 사망하였다. 장수원전 월창정천대녀(長寿院殿月窓貞泉大姉)로 추서되었다. 처음에는 구와나 장수원에 매장되었으나, 사다유키가 이봉되자 마쓰야마 성하에 장수원(나중의 호류지)이 건립되어 위패가 봉안되었다. 계실은 전실 장수원전의 양매이다. 1658년 에도에서 사망하였다. 에도 아자부 조계사에서 화장되었고, 련향원전 호월정감대녀(蓮香院殿湖月貞鑑大姉)라는 시호를 받았다. 유골은 마쓰야마 장수원(호류지)으로 보내져 다시 정련원전 호월정감대녀(浄蓮院殿湖月貞鑑大姉)라는 시호를 받고 매장되었다.

2. 3. 막부 정치 참여

1587년 마쓰다이라 사다카쓰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601년 숙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처음 알현하였고, 1602년 종오위하(従五位下) 하내수(河内守)에 임명되었다. 1605년 시마즈 다다쓰네(가히사)의 양녀를 정실로 맞이하였다. 1607년 아버지에게서 가케가와번 3만 석을 물려받아 다이묘가 되었다. 오사카의 진에서는 후시미성을 경비하였다.

1617년 아버지 사다카쓰의 세자가 되어 가케가와를 막부에 반납하고 구와나번으로 옮겼다. 1624년 사다카쓰가 사망하여 구와나번 11만 석을 계승하였다. 1634년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상락에 동행하여 시종(侍従)에 서임되었다.

1635년 이요 마쓰야마번으로 전봉되었다. 이는 시코쿠 최초의 가문 입부로, 서쪽의 외양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1639년 마쓰야마성의 천수를 5층에서 3층으로 개축하였다. 1644년 나가사키에서 이국선과의 교섭에 임하며 쇄국 제도 완성에 기여하였다. 1651년 도쿠가와 이에쓰나를 보좌하기 위해 유지간힐에 임명되었다.

1658년 72세로 은거하여 가독을 정뢰에게 양위하였다.

2. 4. 만년

1587년에 마쓰다이라 사다카츠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오쿠다이라 노부마사의 양녀이자 오쿠다이라 사다토모의 차녀인 다쓰(たつ)이다. 1601년 숙부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처음 알현하였고, 1602년 종오위하(従五位下) 하내수(河内守)에 임명되었다. 본가와는 별도로 오미국 가모군의 2천 석을 받았으며, 1603년 형 마쓰다이라 사다요시가 자결하여 적자(嫡子)가 되었다. 1605년 시마즈 다다쓰네의 양녀를 정실로 맞이하였고, 1607년 아버지에게서 가케가와번 3만 석을 물려받아 다이묘가 되었다. 오사카의 진에서는 아버지와 함께 후시미성을 경비하였다.

1617년 아버지의 세자가 되어 가케가와를 막부에 반납하고 구와나번으로 옮겼다. 1624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구와나번 11만 석을 계승하였고, 3년 후 오키노카미(隠岐守)로 전임되었고 종사위하(従四位下)로 승진하였다. 1634년 종질인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상락에 동행하여 시종(侍従)에 서임되었고, 기마 공봉을 맡았다.

1635년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명으로 이요국 이요마쓰야마번에 4만 석이 증가되어 전봉되었다. 이는 시코쿠 지방 최초의 가문 입부로, 서국의 외양에 대한 견제와 경계를 위한 조치였다. 1639년 마쓰야마성의 천수를 5층에서 3층으로 개축하였다. 1644년 나가사키 단다이[1]에 취임하여 이국선과의 교섭에 임하고, 쇄국 제도의 완성에 기여하였다. 1651년 어린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를 보좌하기 위해 유지문힐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막정 비판을 하고 스스로 출가한 동생 마쓰다이라 사다마사가 개역되어 정행에게 맡겨져 질거 처분을 받았으나, 정행에게는 연좌가 없었다.

1658년 72세로 은거하여 가독을 적장자 마쓰다이라 사다요리에게 양위하고 마쓰야마 동야 고덴(松山東野御殿)으로 물러나 쇼잔(松山)이라 칭하였다(나중에 가쓰야마로 개칭). 동야 고덴에서는 하이카이와 다도를 즐기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다가 1668년 사망하였다. 향년 82세.

정실은 장남 마쓰다이라 사다요리의 생모로, 1618년 사망하여 장수원전 월창정천대녀(長寿院殿月窓貞泉大姉)로 추서되었다. 처음에는 구와나 장수원에 매장되었으나, 마쓰야마 성하에 장수원(나중의 법룡사)이 건립되어 위패가 봉안되었다. 계실은 전실 장수원전의 양매로, 1658년 에도에서 사망하여 조계사에서 화장되었고, 련향원전 호월정감대녀(蓮香院殿湖月貞鑑大姉)라는 시호를 받았다. 유골은 마쓰야마 장수원(법룡사)으로 보내져 다시 정련원전 호월정감대녀(浄蓮院殿湖月貞鑑大姉)라는 시호를 받고 매장되었다.

3. 가족 관계


  • 정실: 조주인/長寿院일본어 - 시마즈 다다쓰네(島津忠恒)의 양녀, 시마즈 아사히사(島津朝久)의 딸[2]
  • *장남: 마쓰다이라 사다요리(松平定頼) (1607-1662)
  • *사녀: 기쿠히메/菊姫일본어 (?-1661) - 마쓰다이라 마사카쓰(松平昌勝) 정실
  • 계실: 조렌인/浄蓮院일본어 - 시마즈 다다쓰네(島津忠恒)의 양녀, 이주인 다다마사(伊集院忠真)의 딸[3]
  • 측실: 무라오씨/村尾氏일본어
  • *차녀: 류코인/龍光院일본어 (1622-1663) - 사카이 다다토모(酒井忠朝) 정실
  • *삼녀: 구군/倶君일본어 (1637-1692) - 홋타 마사노부(堀田正信) 정실
  • 생모 불명의 자녀
  • *차남: 겟슈켄준/月舟賢順일본어 (1609-1668)[4] - 부코쿠잔호류지/仏国山法龍寺일본어 주지
  • *장녀 (요절)[4]
  • 양자
  • *여자(?-1668): 마쓰다이라 다다토모(松平忠倶) 정실 - 아베 시게쓰구(阿部重次)의 딸[5]

3. 1. 자녀

마쓰다이라 사다유키는 정실로 시마즈 다다쓰네(島津忠恒)의 양녀이자 시마즈 아사히사(島津朝久)의 딸인 장수원(長寿院)을 맞이하였다.[2] 장수원과의 사이에서는 장남 마쓰다이라 사다요리(松平定頼)(1607~1662)와 마쓰다이라 마사카쓰(松平昌勝)의 정실이 된 국희(菊姫, ?~1661)를 낳았다.

이후 시마즈 다다쓰네의 또 다른 양녀이자 이주인 다다마사(伊集院忠真)의 딸인 정련원(浄蓮院)을 계실로 맞이하였다.[3]

측실로는 무라오씨(村尾氏)가 있었다. 무라오씨와의 사이에서는 사카이 다다토모(酒井忠朝)의 정실이 된 차녀 룡광원(龍光院, 1622~1663)과 홋타 마사노부(堀田正信)의 정실이 된 삼녀 구군(倶君, 1637~1692)을 낳았다.

생모 불명의 자녀로는 불국산 법룡사(仏国山法龍寺) 주지가 된 차남 게쓰슈 켄준(月舟賢順, 1609~1668)과 장녀(요절)가 있었다.[4]

양자로는 아베 시게쓰구(阿部重次)의 딸이자 마쓰다이라 다다토모(松平忠倶)의 정실(?-1668)이 있었다.[5]

3. 2. 양자

아베 시게쓰구(阿部重次)의 딸을 양녀로 들여 마쓰다이라 다다토모(松平忠倶)의 정실로 삼았다.[5]

4. 평가

참조

[1] 문서 のちの幕政に正式にある役名ではない
[2] 문서 母は島津義弘長女・御屋地
[3] 문서 母は島津義弘次女・御下
[4] 문서 寛政譜などの系図には記載されていない
[5] 문서 生母は松平定勝の娘正寿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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